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샤를 9세 (문단 편집) === 제1차 위그노 전쟁(1562~1563) === 카트린은 가톨릭의 대표 세력인 기즈 공작이 1562년 바시 대학살 이후 [[위그노]] 측과 제1차 위그노 전쟁(1562~1563)에 돌입한 정세를 이용해 배후에서 신교도와 구교도를 적절히 농단하며 10여 년 사이 왕권을 크게 신장시켰다. 카트린은 무능하고 사치만 일삼는 아들들을 대신하여 대귀족 가문인 기즈 가문과 부르봉 가문의 불화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벌였다. 1562년에 일어난 바시의 학살은 두 종파간에 격렬한 내전을 불러 일으켰다. 부르봉 가의 콩데 공 루이는 악한 대신들로부터 왕과 섭정을 해방시킨다고 선언하며,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조직화하고, 루아르 강 연안의 마을들을 점령하며 군대를 주둔시켰다. 실제로 위그노들은 바시의 학살 이전부터 동원을 개시했지만 루이는 바시의 학살을 칙명이 깨진 증거로 여기고, 군사행동의 대의명분으로 이용했다. 그리고 전투가 일어나자 실제로 칙명은 기즈 가의 압력에 의해 사라졌다. 위그노는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와 '''햄턴코트 조약'''을 맺고, 원조의 담보로 루앙블, 디에프, 루앙을 인도하는 약속을 했다. 이에 잉글랜드군이 루앙블에 상륙했다. 주전장은 주로 루앙과 드루, 오를레앙에서 벌어졌다. 노르망디의 '''루앙 포위전'''(1562. 5~10)에서 국왕군이 마을을 탈환하자 나바르 왕 앙투안이 전사했다. '''드뢰 전투'''(1562. 12)에선 콩데 공 루이가 기즈 가문의 포로가 되었지만 부르봉군도 적군의 사령관인 안 드 몽모랑시를 붙잡았다. 1563년 2월의 '''오를레앙 포위전'''에선 기즈 공 프랑수아가 위그노측 볼트로 드 멜레에 의한 총격을 당해 그 부상이 원인이 되어 사망했다. 기즈 가문은 이 암살이 적대자였던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의 조종으로 이뤄졌다고 믿었다. 기즈 공 프랑수아의 암살로 인해 일어난 폭동과 오를레앙이 함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카트린이 평화협상에 나서 1563년 3월 19일 '''<앙부아즈 칙령>'''을 반포했다. 그러나 <앙부아즈 칙령>은 모든 관계자에게 있어 불만족스러운 것이었는데, 특히 기즈 일파는 이단자와의 위험한 타협을 두고 볼 수 없다며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루아 왕가는 양측간의 화합이 잉글랜드군에 점령당하고 있는 루앙블의 탈환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7월에 잉글랜드군을 축출하는데 성공하자 8월에 샤를 9세가 성인을 선언하고, 모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섭정은 끝났다고 선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